2010년 10월 4일 월요일

로저 워터스《The Wall》 30주년 기념 월드투어 후기


2010. 10. 3. 8:00 pm
TD Garden, Boston, MA

그야 말로 기대를 한참 뛰어넘은 공연이었다. 《The Wall》 앨범의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공연, 그것도 더 이상 핑크 플로이드가 아닌 로저 워터스의 단독 공연이라는 점에서 사실 아주 새로운 것을 기대를 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말로만 듣던 핑크 플로이드 식의 스펙터클을 재연만 해준다면 감사할 따름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예상 외로 아주 입이 딱 벌어져서 나올 수 있었다. 그건 단지 스펙터클 때문이 아니라 공연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현재적 의미 때문이었다. 애초에 《The Wall》 앨범 자체가 단순히 교육에 대한 비판 만이 아닌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 전쟁경제와 재생산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두루 아우르는 수작이었지만, 그래도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것을 다시 공연한다는 것은 자칫 또 하나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로저 워터스도 그 부분을 고민했을 것 같고, 그 결과는 아주 시사적이다.

불꽃이 일고 전투기가 공습사이렌과 함께 무대로 돌진하고 헬리콥터가 관객들에게 핀라이트를 겨누는 개막의 스펙터클이 지나고 대형 애드벌룬으로 된 교사의 형상과 그에 대항하는 어린 학생들의 합창 등등이 나오는 초반까지는 《The Wall》의 뮤직비디오나 영화를 본 이들에게 익숙한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그 와중에 무대 앞과 뒤를 가로지르며 계속해서 벽이 쌓아올려지고 어느새 벽은 스크린의 역할을 겸하며 다양한 비디오 아트를 투영해낸다. 아마 그 즈음부터였던 것 같은데 오바마의 얼굴과 CNN의 로고, 정유회사 쉘(Shell)의 CI 등이 빠르게 화면에 스쳐간다. 그와 함께 나타나는 이라크 공습의 이미지, 관타나모 수용소의 학대 사진의 이미지는 이 공연이 "현재"를 겨냥하고 있음을 강하게 역설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벽이 어느덧 무대를 완전히 가로막을 무렵, 변형가능한 한쪽 벽면을 활용한 세트 무대에는 그야말로 아주 전형적인 미국인 혹은 영국인의 일상이 묘사된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발을 걸치고 TV를 보는 그(로저 워터스)의 일상 옆으로 남은 벽면의 거대한 스크린은 중동 어딘가의 마을에 떨어지는 폭탄의 파열을 담아낸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하얀색 이어폰을 낀 색색의 소들이 현란하게 워킹을 하고 하얀 로고타입으로 "iTeach" "iFollow" "iResist" 등의 단어가 떠다니는 아이팟 패러디가 나타나는가 하면, 네오 나치를 연상케 하는 제복과 깃발의 장면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지도자(로저 워터스)가 확성기로 선동에 나선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영상은 WikiLeak가 폭로해 파문이 일었던, 비무장 이라크 민간인들을 향한 미군들의 총격 살인장면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은 "Bring the Boys Back Home"의 영상 퍼포먼스에서였다. 이 순간을 로저 워터스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야말로 미국인들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찰나였다. "발사된 총과 로켓은 헐벗은 이들, 굶주리고 버림 받은 이들에게 향하는 도둑질이다"라는 메시지가 나타나고 곧 이어 어느 군복 입은 미군 병사가 귀환하여 딸과 재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재회 장면은 미국의 주류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주 전형적인 감동 코드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들이 마침내 포옹하자 관중들은 열광의 환호성과 박수로 들끌었다. 그건 마치 이 병사의 "애국적인" 복무가 충실하게 수행된 후에 조국의 가족과 재회했음을 모두가 인정해준다는 의미의 환호성, 철군이 아니라 복무기간을 성실히 마친 병사의 귀환에 대한 지지의 환호성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에 이어지는 장면은 다시 "도둑질(the Theft)"을 당한 이교도 아이들의 망연자실한 얼굴들, 그리고 그 위로 뜨는 빨간 색의 커다란 타이포그라피 "Bring the Boys Back Home (그 사내들을 집으로 복귀시켜라 - 철군시켜라)"이었다. 이때 환호하던 관중들은 순간 당황한듯 주춤했고, 이내 다시 이 곡의 마무리에 환호했지만 병사 귀환 장면의 환호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그쳤다. 미국적 애국주의의 일상적 한 단면이 폭로되는 순간, 30년된 명곡에의 환호와 국가에의 환호가 한순간 파열음을 내는 순간이었다.

공연은 벽을 허무는 퍼포먼스와 함께 끝났다. 데이빗 길모어의 목소리로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로저 워터스의 목소리로 듣는 "Hey You"로 위안이 되는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