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0일 토요일

생각해보니 한국의 콘서트 문화

한국 관중들이 너무나 열정적이라 메탈리카도 감동하고 오아시스의 콧대도 살짝 돌아갔다는 얘기는 이제 질릴 만큼 자주 오가는 얘기다. 철수 형님 방송에 내한 뮤지션이 출연하면 한국 관중들 얘기가 빠짐없이 나오고, 내한했던 뮤지션들이 떠나면서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는 기사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관중의 한 명으로서 묘한 '자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여기서 잠깐 머무르는 동안 갈 수 있는 공연은 가능한 한 다녀보자는 생각으로 출석을 하다가보니 문득 이유를 알 것 같다. 재작년 익스트림 내한공연을 멜론 악스홀에서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공연장의 규모가 이곳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라이브 공연장들 규모였다. 좀 작은 편이고, 플로어석과 2층의 좌석으로 되어 있는 공연장. 집중도는 높지만 규모가 큰 게 아니다 보니 약간은 급이 낮다는 느낌도 드는 그런 공연장이었다. 그때 플로어에서 (나를 비롯한) 우리 관객들은 방방 뛰고 소리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감동한 게리가 자기들이 멍청해서 한국에 너무 늦게왔다고 말했더랬지. 그런데 여기는 그런 규모의 공연장이 한 도시 도심부에 최소 대여섯 개는 되는 것 같고 그 많은 극장들이 거의 매일마다 공연을 돌리고 있다. 그런 도시들이 주마다 하나씩은 있을테니 대충 50개 도시일테고, 각 도시마다 지역 내에서의 인지도를 갖춘 밴드들이 드글드글하겠지. 서로 돌려가며 공연해도 1년 동안 밴드 밥벌이는 대충 해결 될 것이다. 이렇게 마켓이 크니 한 공연장당 한달에 한번 정도는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뮤지션들이 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도 덜 유명한 밴드들과 다를 바 없이 매년 투어를 하는 것이고, 뉴욕에서 공연하면 가까운 DC나 보스턴에서도 덤으로 할 수 있는거고, 도시마다 있는 공연장들이 공장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으니 장소섭외도 훨신 간단할테고. 즉 멜론 악스홀 같은 작은 규모의 극장에서 소닉 유스나 레니 크래비츠나 예스 같은 밴드들이 공연하는 것은 다반사인 것이며, 대충 2~3년에 한번씩은 그 밴드들이 다시 같은 도시를 찾을 확률도 높은 것이다. 그래서 여기 관중들은 딱히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처럼 익스트림이 결성 19년만에 왔다고 목쉬도록 소리지르며 방방거릴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나. 갑자기 처량해진다. 선생님이 쳐다보지 않아서 한쪽 구석에서 손들고 소리지르며 저 좀 봐달라고 애쓰는 아이가 된 것 같달까나. 선생님이 흡족하게 말한다. "어이구 우리 한국이는 목소리도 우렁차네!"

2010년 2월 18일 목요일

진지희라는 배우

표현력의 수준이 그저 '악동 캐릭터' 정도를 넘어선 것 같다. 대본이나 감독의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수준도 넘어섰다. 하이킥의 어제 에피에서 확연하게 느꼈다.


저 장면에서 이 배우의 웃는 얼굴, 그리고 지칠줄 모르고 "끝까지" 가고야 마는 천진한 악랄함의 표현이 떠오르게 한 것은 지상의 배우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껏 배우 사람의 '연기'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어떤 판타스틱한 세계의 피조물들이었다. 가령 준지 상이 만들었던 이 캐릭터..

끝까지 가면서도 멈춤이 없고 반성의 껀덕지도 없다는 점에서 이 캐릭터의 한 면모가 떠올랐다면, 또 다른 측면에서 떠오른 것은 좀 더 고전적인 아래의 캐릭터다.
뭔가 다 알고 있지만 능글 맞게 그걸 즐기는 우월한 존재!

2010년 2월 15일 월요일

교수회의 총기난사 사건

사실 생각해보면 총기소지가 허용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공포'는 이곳에 오기 전이 더 컸던 것 같다. 정작 여기서는 일상에 도처한 위험물로서의 '총'에 대한 곤두선 신경이 더 무뎌졌다고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놈의 나라는 입국하는 비행기 출발 전부터 액체반입이 안된다느니 커터칼도 못가지고 들어간다느니 하고, 입국수속 때는 알몸투시기까지 도입한다느니(다행히 나는 그 전에 입국했다만) 하면서 온갖 감시와 단속을 하면서도, 일단 들어와서 보면 그딴 것 다 딴 세계 얘기다. 지금도 도서관 한켠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 건물 안에 어느 누가 가슴팍에 총을 들고 있을지 알 수 없고, 그런 것에 대한 예방적 단속도 없다. 하긴 그런 예방적 단속이 일상 곳곳에 있다면 그야말로 판옵티콘이겠지. 지금 미국사회는 총기상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과, 그들의 입김을 막을 힘도 막을 의지도 없지만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만큼은 못견디는 리버럴들이 만들어놓은 묘한 균형 속에 있는 것이다. 총을 지닐 자유와, 총을 지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자유.
그런 '자유'가 만들어놓은 기묘한 마취 속에 살아왔는지, 나 역시 '공포'의 대상이던 총에 대한 관심을 잃은지 꽤 되었다.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딴 생물학계에 꽤 알려진 조교수가 종신자격을 얻지 못해 교수회의에서 총기를 난사했다"는 대학원 사회에서 꽤 낯익은 직책과 상황이 '사건'의 정황으로 알려지고서야 다시 내 바로 옆에 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작년에 입국하고 초반에는 유학생들로부터 들었던 몇몇 사건들(단지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학교 앞 거리에서 총에 맞아 즉사한 아시아계 여학생의 이야기 같은) 때문에 한 동안은 밤에 나돌아다니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일상 속에서 재수없으면 마주칠 '교통사고' 같은 확률의 문제로 치부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상태가 총기상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정신상태인 것도 같다.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2월 9일, 두 가지 회상

1.
학부 때 우리 과 NL들의 필독서, 아니 필수 입문서가 있었다. 아마 우리 과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교재였을 텐데, 당시 나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 책의 저자를 매우 싫어했다.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후배들 앞에서 비판을 해댔으니 꽤나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하겠다. 뭐 지금에 와서도 그 사람의 학문적 스펙트럼과 논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마찬가지긴 하지만 소급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지. ㅋ 아무튼 어쩌다보니 그 문제의 학자가 초청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돌아가면서 인사하는데 기분이 참 묘하더만. 초청자가 초청자다보니만큼 식사 중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북한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모아졌다. 북한에 정통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독일 외교부 주재원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2년 전에 자기가 평양에 갔을 때 겪었던 에피소드를 끝도 없이 쏟아냈다. 나의 기억 때문에 묘한 기분으로 시작했던 식사는 그 끝없는 대화를 통해 또 다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끝났다. 나름 미국 수정주의 역사학의 대가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도 북한은 기이한 무용담을 불러일으키는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곳으로 끊임없이 소환되고 있었다. 하긴 수정주의 역사학이라는 것도 결국 현실주의 정치꾼들과 정치학 장사꾼들하고 대립각을 세울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일 뿐, 기본적인 로직이나 전제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거울쌍이 아닌가. '구국의 횃불'들이 이 장면을 봤어야 하는데.

2.
중고딩 때 나의 취미(?)는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던 조그만 음반 가게의 카세트 테입 선반을 뒤지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음반 산업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성시완 같은 사람들의 비평을 읽으면 한국은 정말 아트락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운 곳임에 분명한데도, 간혹가다가 전혀 의외의 앨범들이 라이센스 테입으로 음반가게 구석에 박혀 있곤했다는 점이다. 《접속》으로 뜨기 전의 Velvet Underground & Nico 바나나 앨범이나 Gentle Giant, Klaatu, 심지어 Triumvirat의 앨범도 먼지가 잔뜩 묻은 채로 동네 음반가게 카세트 테입 선반에서 내가 찾았던 것들이다. 그때 아트락의 입문반으로 정말 테입 늘어지게 들었던 것이 Yes의 《Fragile》이다. Yes는 Pink Floyd보다 좀 낡은 느낌, 그래도 Camel 보다는 뭔가 세련된 느낌, 뭐 그런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버스 타고 지나는 길목에서 봐둔 음반 가게에서 '발굴'해야 했던 먼지 속의 그 앨범들은 내게 '현재형'의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주변 아이들이 모르는 옛날의 가치 있는 음악들을 스스로 찾아내서 향유하는 콜렉터 쯤으로 자기만족을 했던 것 같고, 그건 분명 스노비즘이었다. 슬래시 메탈 마스터 했으니 이제 프로그레시브를 정복해볼까, 모던 재즈를 섭렵했으니 이제 한 단계 높은 프리 재즈다, 뭐 이딴 식의 사고를 했던 것이다. 그게 재수없고 말고를 떠나서 근 20년이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난 대략 군 제대를 전후해서 음악에 관한 한 그런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려는 노력을 아예 접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내 음악적 취향의 바운더리는 결국 그 중고딩 때의 스노비즘이 만든 것 딱 그만큼이다.
별 영양가 없는 얘기를 줄줄 늘어놓은 것은 S군의 분통 터뜨리는 불만이 무서워서인데, 그래도 뭐 Greenday에 Muse까지 직접 봤다니 더 이상 염장이라고는 느끼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래, 나 오늘 잔혹한 일정상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결국 Yes 콘서트를 다녀왔다. 도저히 내 유년을 지배했던 저 신화적인 밴드를 직접 안보고는 못배기겠더라. 벌써 보컬 존 앤더슨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은퇴까지 했는데 언제 영영 은퇴하실지 모르는 노인네들 아닌가. 이건 하늘이 점지한 운명적 만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봤다.
위의 저 식사를 끝마치니 대략 8시 반. 공연은 8시부터 시작. 택시 타고 달려서 가니 그래도 오프닝 밴드가 있었던 것인지 이제 막 시작한 티가 나더라. 새로 바뀐 보컬에 대한 걱정이 좀 있었는데, 귀를 의심케 했다. 66년생이라는 이 '젊은' 보컬은 거의 모창이라 해야할 정도로 오리지널을 잘 카피하고 있었다. 음.. "그럼 프레디 머큐리도 모창으로 대체하고 Queen 재결성을 하면 안되나?" 따위의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다가 스스로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 어떤 밴드보다 보컬의 음색이 아주 독특한 밴드인데 어디서 잘도 이런 클론을 찾아냈구나. 히트곡도 많으신 이 분들, 관객석의 40~50대 어르신들이 다들 따라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가장 즐거웠던 것은 스티브 하우의 쌍기타 신공! 마치 주윤발의 쌍권총 신공을 직접 본 것 같달까 ㅋㅋ 〈Roundabout〉 10분 버전도 좋았다. 이 옹들의 젊은 시절은 본 적도 없지만 살아남아서 이런 신공들을 펼쳐보여주시니 감읍할 따름이다. 다시 한번 산울림이 안타깝다는 생각 잠깐.


Steve Howe 노인의 쌍기타 신공

덧. 대학 시절의 뻘짓 에피소드 하나 더. 새내기 때 학생회 선배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던 친구놈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도 락을 엄청 좋아했다. 한번은 그 녀석이 "○○아, 그래도 얼터너티브는 기존 락에 대해 저항적인 음악인데 아트락은 좀 아니지 않냐? 보수적인 것 같은데"라고 물었고, 내 대답은 "아냐 임마, 아트락을 다른 말로 프로그레시브락이라고 하잖아. 몰라서 그렇지 이게 얼마나 진보적인데"였다. 우문에 우답이다. 아 얼굴 화끈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