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3일 월요일

King Crimson Radical Action 2017 Tour - Austin, TX

더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남긴다. 여기 들어오는 사람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을 위해.

2017년 10월 19일 UT Austin의 Bass Concert Hall에서 킹크림슨의 2017년 북미 투어의 하반기 첫 공연이 있었다. 차로 왕복 5~6시간 걸리는 곳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아예 다시는 이들의 공연을 못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루 숙박까지 곁들여 예매를 했더랬다. 예매 시작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아주 좋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케스트라석에서 뮤지션들의 표정을 볼 수 있는 정도의 거리라서 나름 만족스러운 자리였다.

유년 시절부터 킹크림슨을 좋아해왔다고는 해도 사실 멤버 교체나 2000년대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큰 관심 없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공연을 가기 전에 준비차 찾아본 최근 활동상은 사실 조금 걱정을 끼치는 것이었다. 근 30년 넘게 프론트맨으로 서왔던 리드 보컬 Adrian Belew가 Robert Fripp에게 재계약 없음 통보를 받고 2013년 퇴출되었다는 것은 뭔가 메탈리카 생각도 나고 좀 거시기했다. 과연 새 보컬이 킹크림슨 특유의 음색을 소화해낼 것인가.


미국 락 콘서트는 대부분 판매시에 적혀 있는 시각보다 최소 30분에서 최대 1시간반 뒤에야 본 밴드가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급이 낮은 다른 밴드가 먼저 공연을 하기도 하고, 공연장을 오픈해두고 관객들이 술 사고 기념품 사고 화장실 다녀오는 동안 30분 가까이 배경음악만 깔아놓기도 한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줄 알았던 나는 8시 공연에 8시 조금 넘어 도착해서 데킬라 한 잔 줄 서서 주문하고, 기념품 부스도 구경하고는 10분쯤 어슬렁어슬렁 들어갔다. 아직도 한 20분은 남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런데 웬걸, 이미 그들이 무대 위에 있었고 관객들은 대부분 착석하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행히 첫 곡 시작 직전에 아슬하게 착석.

공연이 끝나고 찾아보니 로버트 프립이 어느 인터뷰에서 이번 투어를 "a double quartet formation"이라고 말했다 한다. 8인으로 된 현재의 밴드 라인업을 두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무대를 정확이 대칭으로 가르는 배치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저 표현을 보면서 동시에 이들이 new classic으로 남고자 하는 욕망을 읽었다. 클래식 공연처럼 거의 정시에 시작하여 중간에 한번의 인터미션을 거쳐 공연 종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그 흔한 밴드 멤버 소개조차 하지 않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엄격하게 통제된 가이드라인에 따라 촬영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각설하고, 아니 저런 짜잘한 곁다리 평가질은 차치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아마도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 아니었을까 한다. 과연 생애 최고라고 말해도 될지 머릿속을 스캔해봤는데, 아직 현역이시던 알 그린을 코 앞에서 본 2009년 공연, 완전체 산울림에게 직접 사인을 받은 1997년 공연 정도가 떠올랐으나... 무대에서 구현되는 퍼포먼스의 짜임새와 무게감을 봤을 때 과연 생애 최고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아니, 이런 걸 어디 동영상으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동영상으로 담아도 느낄 수 없겠지.

우선 가장 놀라웠던 것은 무대 앞 열을 세 대의 드럼 셋이 채웠다는 것이다. 첫 곡부터 이 세 드러머의 드러밍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정말 폭발이라고 말 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그냥 단순히 한 두 대의 드럼 셋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함께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세 드러머가 각기 다른 색깔로 잼을 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사이로 찌르듯이 들어오는 프립의 기타와 레빈의 베이스는 현란함과 과학적 정교함을 동시에 구현했다고 말할 밖에.

2013년부터 프론트맨이 된 Jakko Jakszyk의 보컬도 신기하게 초기 킹크림슨을 연상케 하는 음색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이 공연의 유일한 옥의 티가 그의 Epitaph였을텐데(고음 처리가 안되는 것인지 고음역을 고의로 피했다), 그것 빼고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보컬이었다. 

이 날의 최고 연주는 아마도 Starless였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이 가장 감동적이었고... 콘서트에서 순수하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 곡이 처음이었다. Moonchild에 연이어 나온 연주였는데, 시작부터 탄식을 멈출 수가 없었다. 21st Century Schizoid Man 없이 공연이 끝날 분위기가 되자 관객들은 "Schizoid!"를 연발하기 시작했고, 결국 얻어냈다. 공연이 그 곡으로 끝났다는 것도 뭔가 꽉찬 느낌. 

공연이 끝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이미 11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 적발시 퇴장된다는 문구가 더 이상 무섭지 않은 것은 장점이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밴드가 퇴장하기 전에 찍기 위해 모두 폰을 올려들었고, 프립도 관객들을 사진에 담았다.


보통 공연을 가서도 스스로 막 끌려서 기념품을 사는 경우는 잘 없는데, 이 날은 어떻게든 뭔가를 더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에 줄을 섰다. 공연 컨셉인 Radical Action 이미지와 데뷔앨범 이미지로 된 티셔츠들은 이미 XXL와 S 사이즈 빼고는 동이 나 있었고, 결국 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들진 않지만 뒷면에 투어 리스트가 인쇄된 것과 2017년 시카고 라이브 CD를 사는 것으로.


돌아와서 YouTube와 라이브 CD를 번갈아 듣고 있지만, 공연에서의 그 폭발력은 다시 느낄 수가 없다. 로저 워터스와 데이빗 길모어가 함께 하는 핑크 플로이드 공연이 아닌 바에야 아마도 당분간 내 버킷리스트에는 킹크림슨의 다음 투어들이 상위권을 차지할 듯.


(이건 그나마 현재 라인업으로 하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