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Inglourious Basterds》- 프로파간다에서 헐리우드까지

* 스포일러 탑재

나치를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주겠다던 이 영화는 실상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영화에 관한 영화, 메타 영화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하겠다. 물론 타란티노 영화가 대부분 그렇겠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하는 일 없이 입만 나불거리는 루터넌트 레인(브래드 피트)도 아니고, 비장미를 보여주는 유대계 프랑스인 쇼산나 드레퓌스(멜라니 로랑)도 아니고, 히틀러도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괴벨스와 그의 영화, 제3제국의 프로파간다 영화다. 물론 셀지오 레오네에게 바친 오프닝이나 G.W. 팝스트에게 오마주를 넘어서 몇 차례의 직접적인 인용을 바치는 데서는 타란티노식 버무림이 여전하지만.

팝스트와 레니 리펜슈탈의 산악영화《피츠 팔뤼의 백색 지옥(Die weiße Hölle vom Piz Palü)》의 간판이 걸려있는 영화관, 그곳에서 나치당은 프로파간다 영화 《조국의 긍지(Stolz der Nation)》의 프리미어를 계획한다. 바스터즈 일당은 그들대로, 영화관의 소유주이자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쇼산나는 그녀대로 히틀러와 괴벨스 등 나치당의 핵심인물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프로파간다의 제작과 상영과, 또 프로파간다가 낳은 여러 상징들이 사이사이에 녹아들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더구나 그들, 프로파간다의 스타들, 전쟁영웅인 동시에 괴벨스가 기획한 프로파간다 영화로 영화화되는 소재이면서, 또 동시에 그 자신이 자기 역할을 직접 연기하는 은막의 스타인 졸러 이병(다니엘 브륄), 마를렌 디트리히가 거부했던 '제국 스타'인 동시에 마타 하리의 다른 버전인 여배우 해머스마크(다이앤 크루거), 그리고 그 자신 실제 역사 속에서 프로파간다 영화의 스타였던 에밀 야닝스의 등장까지.

그래서 쇼산나의 불타는 화면으로 나치를 대량 학살하는 후반부의 대장관은 프로파간다의 몸통이 되었던 극장이 스스로 몸살라 관객들을 집어 삼킨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의 종착역이자, 프로파간다 너머의 프로파간다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결말을 택하면서까지 최대치의 말초적 재미를 추구하는 타란티노의 헐리우드 오마주 역시 이 메타영화의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하는 일 없는' 주인공 아닌 주인공 브래트 피트는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서부극과 느와르와 B급영화의 온갖 클리셰를 넘나드는 이 영화는 2차대전을 다룬 기존의 역사영화, 전쟁영화들의 무게감 따위를 가볍게 조롱한다.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교차하는 40년대 파리의 한복판에서 미국 뒷골목의 언어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는 브래드 피트는 그래서 그 자신 헐리우드 클리셰를 인물화한 캐릭터다.

프로파간다의 파국과 초-프로파간다적 산화가 끝이 아닌 것은, 바로 이 헐리우드 클리셰 역시 극단의 환영성을 통해 괴벨스의 학살영화와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학살에 뛰어든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는 졸러 이병의 모습은 잠시동안 이를 환기시켜주는 비판적 순간이지만, 히죽히죽 웃으며 나치 장교의 이마에 칼끝으로 하켄크로이츠를 새기는 브래드 피트의 클로즈업으로 끝맺는 잔혹성은 단지 악취미가 아니라 영화(프로파간다, 그리고 헐리우드)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자조적이면서도 자신감에 찬 일갈이다.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또 다른 부고

친구의 블로그에서 Anne Friedberg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글을 보고 퍼뜩 생각이나 찾아봤더니 또 다른 비보가 있었다. Masao Miyoshi 교수 역시 이번 달에 돌아가셨구나...

저 분을 모셔오겠다고 이메일로 씨름했던 것이 5월인데 고작 반년도 안된 일이다. 쓸데없이 까다로운 공공기관 행정시스템 때문에 온갖 추가 문서를 만들어가면서 겨우 겨우 초청을 성사시켰는데, 한 3주 지나서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이상하게 2주 정도 몸이 안좋아서 CT촬영을 했는데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나는 이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다가올 죽음을 즐기려는 중이다."

80노인이었지만, 새롭게 던져진 topic에 부응하고자 여러 편의 영화를 직접 찾아보며 성실하게 발표 준비를 한 것이 역력했던 abstract를 보내왔던 터라 그렇게 갑작스럽게 초청이 취소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었고, 당연히 행사에는 타격이 있었다. 그래도 본인에게 준 충격만 했을까. 담담하면서도 문학적인 마지막 메일이 그러고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참 빨리도 가셨다..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사법부의 자기증명

이번 미디어법 판결은 소위 '사법정의'라는 것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판결은 헌재와 사법부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가장 솔직하게 증명한 사건이다.
토론과 합의, 법적 엄정함을 통해 만들어가는 법치주의의 공화국가란 허구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세를 만들 것이냐, 어떻게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냐, 어떻게 포장할 것이냐다.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요즘 안방극장의 최고 히로인 두 명


어째 둘이 닮은 것 같지 않나? ㅋ
아놔, 저 두 사람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본방사수 비슷한 당일사수를 하고 있다 ㅡㅡ;;
고현정이 저렇게 카리스마 만빵으로 돌아올 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우리 은솔이가 해리가 되어 저렇게 표독한 역할로 돌아올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기대가 크다! (-> 아놔, 이거 정말 나이 든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하는 말의 그것이로군)

2009년 10월 24일 토요일

그들의 '진보' 프레임



네이버와 야후의 뉴스 댓글이 이 나라 '수구꼴통' 일반의 프레임을 보여준다면, 네이트와 다음의 뉴스 댓글은 자칭타칭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의 프레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개 '합리적인 보수'에서부터 '중도'를 거쳐 '진보'로 생각하는 정도까지의 부류들의 집합인 것으로 보이며, 정치 관련 기사의 베스트 댓글을 보면 대개 그런 포지션의 사람들이 취한다고들 생각되는 입장이 담긴 주장이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이명박을 욕하고, 한나라당을 욕하고, 조중동을 욕하는, 뭐 대충 그 정도.

그런데 그게 참 거시기하단 말이지. 저런 댓글들을 보면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뭔가 한없이 고독해지는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이명박을 낳은 것은 말이다, 당신들이 적대하는 그 무리들이 아니다. 이명박을 낳은 것은 당신들이다.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미국 우익들

사진을 못 찍어 놓은 것이 정말 안타까운데.. 이 학교 캠퍼스 중간 쯤에 이동인구가 정말 많은 광장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 수업을 듣기 위해 자주 지나다니는 곳으로, 지난주 월요일 아침에도 지나는 길이었다. 멀찍이 보니 바닥에 뭔가가 여러개 꽂혀 있다. 다시 보니 성조기다. 조그마한 미니어처로 여러개가 바닥에 꽂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라크전이나 아프간전 전사자를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반전 운동에서 저런 국가주의적 상징이 쓰인다는 점은 못내 답답하지만 그래도 뭐 철군하자는 얘긴데, 하며 다가섰더니 엥?
"Over 140 US babies are aborted now." 반전운동은 개뿔. 낙태반대 운동하는 우익들의 설치미술(?)이었다. 오, 심오하여라.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낙태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태아들이 US baby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낙태된 태아는 성조기 하나로 표현된다. 참전 전사자들의 추모공원처럼 조성된 그 미니어처에서 전선(戰線)은 낙태 허용 찬/반 논쟁을 사이로 그어져 있고, 140개의 깃발은 전투에서 전사(!)한 태아 용사들을 기리는 것이다.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솔직히 공포심이 들어 가까이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저런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며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사진으로 남겨놓아야지 했는데, 안타깝게도 주말이 가까워져 비가 오면서 철수되었다.

그런데 반전운동에서 쓰였던 상징체계를 스리슬쩍 자신들의 것으로 전유하는 미국 우익들의 가공할 능력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17일 팔레스타인 행동의 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제(토요일)도 작은 집회가 있었다. 미국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함께 집회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갔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집회에 웬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이나?
어리둥절하며 살짝 거리를 두고 뒤로 돌아갔더니 이제야 팔레스타인 관련 구호가 쓰여진 피켓들이 보인다. 어찌 된 영문인고 하니, 워낙 어제 집회가 규모가 크지 않고 경찰의 동행 하에 이루어지는 평화집회다보니 동네 유대인 우익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숫자는 적었지만 무슨 질긴 스토커 같은 이 할매 할배들은 계속해서 대오의 앞자리를 빼앗았고, 그러다보니 집회 전체가 이스라엘의 안녕을 기원하는 반테러리즘 행진 비스무리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경찰놈들이란 다 똑같아서 이런 모습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한 행진 지도부는 그냥 우익들과 함께 분란 없이 행진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남의 것을 전유하는 미국 우익들의 집요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팔레스타인 행동의 날을 앞둔 예비 집회. 저 앞에 하얀 피켓의 정체는?


응, "이스라엘은 곧 민주주의"란다. 지독한 놈들.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오소영 2집 최고의 곡은

나중에 바뀔 수도 있겠지만, 일단 최초 3회 연속 청취 후 내린 판단으로는 6번 트랙 "그만 그말 그만"이었음. 멜론으로 듣다가 딴에는 6번째에 숨어 있는 보석을 발견했다 생각하고 기뻐했으나, 향뮤직 홈페이지 상에는 그게 타이틀곡이라고 되어있군. ㅡㅡ;;; 타이틀곡을 6번째에 싣는 것은 LP로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인가?

그만 그 말 그만 promotion video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Ground Zero #2 - Propaganda

그라운드 제로 / 저런 식으로 공사벽을 둘러놓았다.

재건 공사 노동자들 사진 모자이크 / "애국적이고", "인종적으로 다양한" 노동의 이미지


"건강한", "미래지향적인" 노동의 이미지


Tribute World Trade Center Visitor Center 외벽


무역센터 전철역 입구 /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이 역은 폐쇄되어 있다. 일상의 불편함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게 만드는 프로파간다의 공간.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Ground Zero

추석 맞이..는 아니고, 여차저차 아는 사람들도 만날 겸, 모 기관의 해외공연도 도울 겸(?) 뉴욕에 와 있는 중이다. 오늘은 아는 사람들과 함께 나름 뉴욕여행(?)을 했다. 사실 이 도시 자체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반나절 돌아다니면 눈이 아플 정도로 공기가 안좋고, 볼거리라곤 대부분 빽빽이 들어찬 건물숲이라 그닥 새로울 것도 없다. 화면으로 보는 것이나 실제로 보는 것이나. 오히려 화면이 더 때깔이 좋을 듯하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2층의 버추얼 라이드 투어를 볼까도 했으나, 본인들도 실제보다 버추얼이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전망대 입장가격(18$)의 두 배나 되는 입장료를 받는 것을 보고 양쪽 다 GG쳤다.

아무튼 오늘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다름 아닌 그라운드 제로, 9/11로 무너져 내린 무역센터 자리였다. 그게 2001년이었다니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긴 세월, 그 자리는 지금 새 건물을 짓겠다고 공사가 진행중이었지만 여전히 잔해 더미를 공사벽으로 막아놓은 것에 불과한 상태였다. 그 옆으로 돌아가니 보이는 9/11 메모리얼 기념관. 한쪽에는 재건에 나선 공사노동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모자이크한 사진벽이, 모퉁이를 돌아 다른 쪽에는 진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소방관 얼굴 사진 모자이크와 그들에게 바치는 청동 양각 기념화가 걸려있다. 엄숙한 관람객들과 비스듬히 걸려 있는 성조기. 오오 이곳에 이라크가 있고, 이곳에 관타나모가 있고, 이곳에 이곳 사람들의 그 견고한 ground가 있구나. 누군지 몰라도 이름 참 잘 지었다. 순간 살짝 소름이.

저녁이 다 되어 《Once Upon A time In America》와 《브룩클린의 마지막 비상구》에서 보았던 맨하탄 다리의 그 전경을 보기 위해 어렵사리 브룩클린 다리를 넘었다. 어둑해진 속에 찾은 그 곳의 광경은 과연 노력한 만큼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