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못 찍어 놓은 것이 정말 안타까운데.. 이 학교 캠퍼스 중간 쯤에 이동인구가 정말 많은 광장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 수업을 듣기 위해 자주 지나다니는 곳으로, 지난주 월요일 아침에도 지나는 길이었다. 멀찍이 보니 바닥에 뭔가가 여러개 꽂혀 있다. 다시 보니 성조기다. 조그마한 미니어처로 여러개가 바닥에 꽂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라크전이나 아프간전 전사자를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반전 운동에서 저런 국가주의적 상징이 쓰인다는 점은 못내 답답하지만 그래도 뭐 철군하자는 얘긴데, 하며 다가섰더니 엥?
"Over 140 US babies are aborted now." 반전운동은 개뿔. 낙태반대 운동하는 우익들의 설치미술(?)이었다. 오, 심오하여라.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낙태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태아들이 US baby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낙태된 태아는 성조기 하나로 표현된다. 참전 전사자들의 추모공원처럼 조성된 그 미니어처에서 전선(戰線)은 낙태 허용 찬/반 논쟁을 사이로 그어져 있고, 140개의 깃발은 전투에서 전사(!)한 태아 용사들을 기리는 것이다.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솔직히 공포심이 들어 가까이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저런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며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사진으로 남겨놓아야지 했는데, 안타깝게도 주말이 가까워져 비가 오면서 철수되었다.
그런데 반전운동에서 쓰였던 상징체계를 스리슬쩍 자신들의 것으로 전유하는 미국 우익들의 가공할 능력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17일 팔레스타인 행동의 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제(토요일)도 작은 집회가 있었다. 미국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함께 집회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갔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집회에 웬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이나?
어리둥절하며 살짝 거리를 두고 뒤로 돌아갔더니 이제야 팔레스타인 관련 구호가 쓰여진 피켓들이 보인다. 어찌 된 영문인고 하니, 워낙 어제 집회가 규모가 크지 않고 경찰의 동행 하에 이루어지는 평화집회다보니 동네 유대인 우익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숫자는 적었지만 무슨 질긴 스토커 같은 이 할매 할배들은 계속해서 대오의 앞자리를 빼앗았고, 그러다보니 집회 전체가 이스라엘의 안녕을 기원하는 반테러리즘 행진 비스무리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경찰놈들이란 다 똑같아서 이런 모습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한 행진 지도부는 그냥 우익들과 함께 분란 없이 행진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남의 것을 전유하는 미국 우익들의 집요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팔레스타인 행동의 날을 앞둔 예비 집회. 저 앞에 하얀 피켓의 정체는?
응, "이스라엘은 곧 민주주의"란다. 지독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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