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Invictus》단평

하필 이 시점에 웬 만델라?
실은 South Africa가 아니라 North America였던 것이고,
넬슨이 아니라 버락이었던 것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 동림 옹의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헌사.
노빠들이 좋아할 만한 전개.
그런 만큼 비현실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

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위험한 장소"의 인종과 계급 정치학

Keith Jarrett이 뉴저지에서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심 끝에 보러 가기로 했다. 한국 공연이 공연장에 대한 Jarrett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좌초된 적이 있기 때문에 뉴저지까지 가는 교통비나 숙박비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공연이 개최된 뉴왁(Newark)은 뉴욕의 할렘 못지 않게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곳이었다. Rutgers를 비롯해 네 개의 대학이 있는 곳이지만, 워낙에 총기사고나 강도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가기 전부터 긴장을 좀 했다. 공연이 늦게 끝날테니 가깝고 싼 숙소로 하자 싶어서 YMWCA가 운영하는 호스텔에 예약을 해두었는데, 위험한 장소에 대한 공포심이 공연 하루 전날 급팽창하는 바람에 기차역과 호스텔 사이의 최단거리를 찾느라 구글맵과 뉴저지 운송사이트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마음을 졸이며 Broad Street 역에서 내린 시각은 6시. 이미 어둑어둑한 참이었고 거리는 한산했다. 호스텔 맞은 편에 있는 Washington Park 쪽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에서 스케이트보드 타는 소리가 들렸다. 껄렁한 10대들과 시비라도 걸릴새라 빠른 발걸음으로 지나는데 의외로 재밌는 광경이 보였다. 대충 15살 남짓으로 보이는 흑인 하나, 백인 하나의 사내애들 둘이서 놀고 있었다. 한 녀석은 보드를 타고 슬라이딩을 시도하고 다른 녀석은 보드를 트랙 삼아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내 편견인지는 몰라도 보스턴에서는 저 나이 또래의 흑인, 백인 아이들이 같이 노는걸 본 적이 없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고 동네를 둘러보니 그때서야 긴장이 풀리고 뭔가 느낌이 왔다. 길에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 후줄그레한 복장의 흑인들. 여긴 그저 전반적인 주민들의 소득 수준이 낮은 동네일 뿐이다. 백인들도 필시 중산층 이하의 가정의 아이들일테고, 흑인이나 히스패닉의 진입장벽이 높은 사립학교 같은 곳이 아닌 공립학교나 싼 사립학교를 다닐테니 어울려 노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테지.
YMWCA에 들어서니 희미한 느낌은 강렬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곳은 호스텔로 룸을 렌트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빈민들이 싸게 공동주거하는 곳. 저층은 그렇게 들어온 가족단위의 빈민들이 사는 곳 같았고, 그 위로 여행객들을 받는 듯했다. 시끄럽게 애들 우는 소리가 들리고, 분명 빈곤 때문에 정크푸드로 살을 찌웠을 비만의 엄마들이 아이들을 다독인다. 흑인들과 히스패닉, 드물게 인도나 아랍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 백인들도 보였는데 늙어서 거동이 힘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나 어딘지 몸이 불편해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쪽에서 역시 흑인인 관리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규정을 준수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1시간 가량이나 걸려 체크인을 하고 올라간 9층 숙소는 1인 1실이라 조용했지만, 시설은 무척 열악했다. 하루만 자고 일찍 체크아웃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같은 층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흑인 아이들이었다. 그냥 여행객으로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분위기를 보니 대부분 인근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 같았고, 아마도 이곳은 그네들에게 기숙사 같은 곳으로 쓰이나보다.
그리고 8시 공연. 공연장 입구에 들어서니 이제 뉴왁의 그 "악명"의 진원지를 알겠다. 프루덴셜 같은 거대 금융자본이 투자를 해서 지어진 뉴저지퍼포밍아트센터(NJPAC)는 보스턴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크고 세련된 디자인의 건물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관객들은 와인 한잔씩 마시는 중이었고, 그 대부분은 백인들이었다. 간혹 나 같은 아시아인들이 보였지만 흑인이나 히스패닉은 드물었다. 아마 그 상당수는 자가용을 몰고 와서 주차장에서 이곳으로 바로 왔겠지. 바로 옆 블럭에 붙어 있는 YMWCA와 이곳의 분위기는 그 물리적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판이했다. 유리벽 바깥의 뉴왁은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두려운 곳일테다. 분명 그곳에서는 총기사고도 있었을 것이고 강도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이곳에 대한 공포의 모든 것은 아닐테다. 이곳은 그들에게 너무나 다른 이들이 사는 곳이고 그 다른 이들은 뭔가 자신들의 재산과 안위를 위협할 것만 같은 존재들일테다.
아시아인들, 특히 한국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높은 교육수준과, 또 아마도 비자라는 높은 진입장벽을 뚫은 경제적 배경 덕택에 문화적으로 백인사회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많다고 들었고 또 그렇다고 느끼고 있다. Keith Jarrett을 좋아하는 나는 뭘까, 여기서 와인을 들고서 약식으로 스탠딩 파티를 즐기는 중인 관객들 속의 나는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좋았지만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고, 예술가의 열정으로 난해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피아니스트의 위트에 솔직하게 박수 치기도 쉽지 않았다.


뉴왁 브로드 스트릿 역 입구. 교육도시임을 강조해 놓은 간판.



멀리 프루덴셜 건물이 보인다.


YMWCA 숙소. 하루 정도 자고 나갈 만은 했지만, 기숙사로 쓰기엔 많이 낡고 지저분했다.


뉴저지 퍼포밍아트센터 프루덴셜홀.



공연장의 관객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헌재가 먼저냐, 박지만이 먼저냐?

지만씨 측은 가처분 신청에서 "박 전 대통령은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에 근무했으며 조선 독립군 토벌 등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반발했다.

이 개그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 카피레프트로 쓰고 있는거야? '레프트'는 좌빨인데? o.O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Inglourious Basterds》- 프로파간다에서 헐리우드까지

* 스포일러 탑재

나치를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주겠다던 이 영화는 실상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영화에 관한 영화, 메타 영화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하겠다. 물론 타란티노 영화가 대부분 그렇겠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하는 일 없이 입만 나불거리는 루터넌트 레인(브래드 피트)도 아니고, 비장미를 보여주는 유대계 프랑스인 쇼산나 드레퓌스(멜라니 로랑)도 아니고, 히틀러도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괴벨스와 그의 영화, 제3제국의 프로파간다 영화다. 물론 셀지오 레오네에게 바친 오프닝이나 G.W. 팝스트에게 오마주를 넘어서 몇 차례의 직접적인 인용을 바치는 데서는 타란티노식 버무림이 여전하지만.

팝스트와 레니 리펜슈탈의 산악영화《피츠 팔뤼의 백색 지옥(Die weiße Hölle vom Piz Palü)》의 간판이 걸려있는 영화관, 그곳에서 나치당은 프로파간다 영화 《조국의 긍지(Stolz der Nation)》의 프리미어를 계획한다. 바스터즈 일당은 그들대로, 영화관의 소유주이자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쇼산나는 그녀대로 히틀러와 괴벨스 등 나치당의 핵심인물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프로파간다의 제작과 상영과, 또 프로파간다가 낳은 여러 상징들이 사이사이에 녹아들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더구나 그들, 프로파간다의 스타들, 전쟁영웅인 동시에 괴벨스가 기획한 프로파간다 영화로 영화화되는 소재이면서, 또 동시에 그 자신이 자기 역할을 직접 연기하는 은막의 스타인 졸러 이병(다니엘 브륄), 마를렌 디트리히가 거부했던 '제국 스타'인 동시에 마타 하리의 다른 버전인 여배우 해머스마크(다이앤 크루거), 그리고 그 자신 실제 역사 속에서 프로파간다 영화의 스타였던 에밀 야닝스의 등장까지.

그래서 쇼산나의 불타는 화면으로 나치를 대량 학살하는 후반부의 대장관은 프로파간다의 몸통이 되었던 극장이 스스로 몸살라 관객들을 집어 삼킨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의 종착역이자, 프로파간다 너머의 프로파간다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결말을 택하면서까지 최대치의 말초적 재미를 추구하는 타란티노의 헐리우드 오마주 역시 이 메타영화의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하는 일 없는' 주인공 아닌 주인공 브래트 피트는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서부극과 느와르와 B급영화의 온갖 클리셰를 넘나드는 이 영화는 2차대전을 다룬 기존의 역사영화, 전쟁영화들의 무게감 따위를 가볍게 조롱한다.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교차하는 40년대 파리의 한복판에서 미국 뒷골목의 언어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는 브래드 피트는 그래서 그 자신 헐리우드 클리셰를 인물화한 캐릭터다.

프로파간다의 파국과 초-프로파간다적 산화가 끝이 아닌 것은, 바로 이 헐리우드 클리셰 역시 극단의 환영성을 통해 괴벨스의 학살영화와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학살에 뛰어든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는 졸러 이병의 모습은 잠시동안 이를 환기시켜주는 비판적 순간이지만, 히죽히죽 웃으며 나치 장교의 이마에 칼끝으로 하켄크로이츠를 새기는 브래드 피트의 클로즈업으로 끝맺는 잔혹성은 단지 악취미가 아니라 영화(프로파간다, 그리고 헐리우드)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자조적이면서도 자신감에 찬 일갈이다.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또 다른 부고

친구의 블로그에서 Anne Friedberg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글을 보고 퍼뜩 생각이나 찾아봤더니 또 다른 비보가 있었다. Masao Miyoshi 교수 역시 이번 달에 돌아가셨구나...

저 분을 모셔오겠다고 이메일로 씨름했던 것이 5월인데 고작 반년도 안된 일이다. 쓸데없이 까다로운 공공기관 행정시스템 때문에 온갖 추가 문서를 만들어가면서 겨우 겨우 초청을 성사시켰는데, 한 3주 지나서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이상하게 2주 정도 몸이 안좋아서 CT촬영을 했는데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나는 이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다가올 죽음을 즐기려는 중이다."

80노인이었지만, 새롭게 던져진 topic에 부응하고자 여러 편의 영화를 직접 찾아보며 성실하게 발표 준비를 한 것이 역력했던 abstract를 보내왔던 터라 그렇게 갑작스럽게 초청이 취소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었고, 당연히 행사에는 타격이 있었다. 그래도 본인에게 준 충격만 했을까. 담담하면서도 문학적인 마지막 메일이 그러고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참 빨리도 가셨다..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사법부의 자기증명

이번 미디어법 판결은 소위 '사법정의'라는 것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판결은 헌재와 사법부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가장 솔직하게 증명한 사건이다.
토론과 합의, 법적 엄정함을 통해 만들어가는 법치주의의 공화국가란 허구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세를 만들 것이냐, 어떻게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냐, 어떻게 포장할 것이냐다.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요즘 안방극장의 최고 히로인 두 명


어째 둘이 닮은 것 같지 않나? ㅋ
아놔, 저 두 사람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본방사수 비슷한 당일사수를 하고 있다 ㅡㅡ;;
고현정이 저렇게 카리스마 만빵으로 돌아올 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우리 은솔이가 해리가 되어 저렇게 표독한 역할로 돌아올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기대가 크다! (-> 아놔, 이거 정말 나이 든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하는 말의 그것이로군)

2009년 10월 24일 토요일

그들의 '진보' 프레임



네이버와 야후의 뉴스 댓글이 이 나라 '수구꼴통' 일반의 프레임을 보여준다면, 네이트와 다음의 뉴스 댓글은 자칭타칭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의 프레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개 '합리적인 보수'에서부터 '중도'를 거쳐 '진보'로 생각하는 정도까지의 부류들의 집합인 것으로 보이며, 정치 관련 기사의 베스트 댓글을 보면 대개 그런 포지션의 사람들이 취한다고들 생각되는 입장이 담긴 주장이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이명박을 욕하고, 한나라당을 욕하고, 조중동을 욕하는, 뭐 대충 그 정도.

그런데 그게 참 거시기하단 말이지. 저런 댓글들을 보면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뭔가 한없이 고독해지는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이명박을 낳은 것은 말이다, 당신들이 적대하는 그 무리들이 아니다. 이명박을 낳은 것은 당신들이다.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미국 우익들

사진을 못 찍어 놓은 것이 정말 안타까운데.. 이 학교 캠퍼스 중간 쯤에 이동인구가 정말 많은 광장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 수업을 듣기 위해 자주 지나다니는 곳으로, 지난주 월요일 아침에도 지나는 길이었다. 멀찍이 보니 바닥에 뭔가가 여러개 꽂혀 있다. 다시 보니 성조기다. 조그마한 미니어처로 여러개가 바닥에 꽂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라크전이나 아프간전 전사자를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반전 운동에서 저런 국가주의적 상징이 쓰인다는 점은 못내 답답하지만 그래도 뭐 철군하자는 얘긴데, 하며 다가섰더니 엥?
"Over 140 US babies are aborted now." 반전운동은 개뿔. 낙태반대 운동하는 우익들의 설치미술(?)이었다. 오, 심오하여라.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낙태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태아들이 US baby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낙태된 태아는 성조기 하나로 표현된다. 참전 전사자들의 추모공원처럼 조성된 그 미니어처에서 전선(戰線)은 낙태 허용 찬/반 논쟁을 사이로 그어져 있고, 140개의 깃발은 전투에서 전사(!)한 태아 용사들을 기리는 것이다.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솔직히 공포심이 들어 가까이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저런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며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사진으로 남겨놓아야지 했는데, 안타깝게도 주말이 가까워져 비가 오면서 철수되었다.

그런데 반전운동에서 쓰였던 상징체계를 스리슬쩍 자신들의 것으로 전유하는 미국 우익들의 가공할 능력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17일 팔레스타인 행동의 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제(토요일)도 작은 집회가 있었다. 미국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함께 집회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갔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집회에 웬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이나?
어리둥절하며 살짝 거리를 두고 뒤로 돌아갔더니 이제야 팔레스타인 관련 구호가 쓰여진 피켓들이 보인다. 어찌 된 영문인고 하니, 워낙 어제 집회가 규모가 크지 않고 경찰의 동행 하에 이루어지는 평화집회다보니 동네 유대인 우익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숫자는 적었지만 무슨 질긴 스토커 같은 이 할매 할배들은 계속해서 대오의 앞자리를 빼앗았고, 그러다보니 집회 전체가 이스라엘의 안녕을 기원하는 반테러리즘 행진 비스무리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경찰놈들이란 다 똑같아서 이런 모습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한 행진 지도부는 그냥 우익들과 함께 분란 없이 행진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남의 것을 전유하는 미국 우익들의 집요함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팔레스타인 행동의 날을 앞둔 예비 집회. 저 앞에 하얀 피켓의 정체는?


응, "이스라엘은 곧 민주주의"란다. 지독한 놈들.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오소영 2집 최고의 곡은

나중에 바뀔 수도 있겠지만, 일단 최초 3회 연속 청취 후 내린 판단으로는 6번 트랙 "그만 그말 그만"이었음. 멜론으로 듣다가 딴에는 6번째에 숨어 있는 보석을 발견했다 생각하고 기뻐했으나, 향뮤직 홈페이지 상에는 그게 타이틀곡이라고 되어있군. ㅡㅡ;;; 타이틀곡을 6번째에 싣는 것은 LP로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인가?

그만 그 말 그만 promotion video

2009년 10월 5일 월요일

Ground Zero #2 - Propaganda

그라운드 제로 / 저런 식으로 공사벽을 둘러놓았다.

재건 공사 노동자들 사진 모자이크 / "애국적이고", "인종적으로 다양한" 노동의 이미지


"건강한", "미래지향적인" 노동의 이미지


Tribute World Trade Center Visitor Center 외벽


무역센터 전철역 입구 /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이 역은 폐쇄되어 있다. 일상의 불편함 속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게 만드는 프로파간다의 공간.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Ground Zero

추석 맞이..는 아니고, 여차저차 아는 사람들도 만날 겸, 모 기관의 해외공연도 도울 겸(?) 뉴욕에 와 있는 중이다. 오늘은 아는 사람들과 함께 나름 뉴욕여행(?)을 했다. 사실 이 도시 자체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반나절 돌아다니면 눈이 아플 정도로 공기가 안좋고, 볼거리라곤 대부분 빽빽이 들어찬 건물숲이라 그닥 새로울 것도 없다. 화면으로 보는 것이나 실제로 보는 것이나. 오히려 화면이 더 때깔이 좋을 듯하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2층의 버추얼 라이드 투어를 볼까도 했으나, 본인들도 실제보다 버추얼이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전망대 입장가격(18$)의 두 배나 되는 입장료를 받는 것을 보고 양쪽 다 GG쳤다.

아무튼 오늘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다름 아닌 그라운드 제로, 9/11로 무너져 내린 무역센터 자리였다. 그게 2001년이었다니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긴 세월, 그 자리는 지금 새 건물을 짓겠다고 공사가 진행중이었지만 여전히 잔해 더미를 공사벽으로 막아놓은 것에 불과한 상태였다. 그 옆으로 돌아가니 보이는 9/11 메모리얼 기념관. 한쪽에는 재건에 나선 공사노동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모자이크한 사진벽이, 모퉁이를 돌아 다른 쪽에는 진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소방관 얼굴 사진 모자이크와 그들에게 바치는 청동 양각 기념화가 걸려있다. 엄숙한 관람객들과 비스듬히 걸려 있는 성조기. 오오 이곳에 이라크가 있고, 이곳에 관타나모가 있고, 이곳에 이곳 사람들의 그 견고한 ground가 있구나. 누군지 몰라도 이름 참 잘 지었다. 순간 살짝 소름이.

저녁이 다 되어 《Once Upon A time In America》와 《브룩클린의 마지막 비상구》에서 보았던 맨하탄 다리의 그 전경을 보기 위해 어렵사리 브룩클린 다리를 넘었다. 어둑해진 속에 찾은 그 곳의 광경은 과연 노력한 만큼 만족스러웠다.

2009년 9월 27일 일요일

간만의 호사

10/15 10/21 11/22


음.. 저 사람들의 공연을 모두 6만원 안팎의 싼 가격에 볼 수 있다니 감격이다.
더구나 레니 공연 빼곤 둘 다 플로어석이라는 거!



2009년 9월 24일 목요일

정보용역업체의 명의사칭

대한민국 특정 정파의 사익(私益)을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는 용역업체 (주)국가정보원에서 최근 업체 명의를 '대한민국'으로 사칭하여 물의를 빚고 있다. 공공목적의 세금을 사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바 많은 원성을 받아왔던 이 회사는 그런 특혜시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업영역을 공익에 준하는 것으로 포장해왔으며, 드디어 스스로를 고용주의 이름으로 참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용주들은 부조리에 못겨워하며 자신들을 고용주 명단에서 빼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http://wonsoon.com/814 참조). 그런데 이 업체가 진정 악덕 사업자임을 보여주는 사실이 또 한가지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부당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배상이 청구되더라도 이들이 고용주의 계좌에서 이를 무단 변제할 것임이 명확하여 난감한 상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오호 통재라.

2009년 9월 19일 토요일

살벌한 미국 의보개혁 논의

TV를 사고 유선 달고 하는게 귀찮아서 MS와 NBC가 공동으로 만든 인터넷 뉴스채널 MSNBC를 주로 보고 있는데, 오늘 본 장면이 상당히 살벌했다. 공화당원들이 오바마의 의보개혁에 대해 토론회 같은걸 하면서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청중들이 보도하는 카메라 앞으로 와서 기자한테 "너 때문에 토론 내용을 들을 수 없다. 너는 지금 대단히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 보도하려면 나가서 해라"며 따지는 것이다. 뭐 짜증날 수 있는 일이지만, 저런 자리에 주최측의 초청으로 온 방송사인데, 그것도 생방으로 전세계에 보도되는 카메라 앞에서 적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저렇게 따지는 분위기라니. 세 명이었는데 그 중 둘은 점잖으신 백인 할배들이었고, 한 명은 매우 모범적인 인상의 젊은 백인 여성이었다. 잠깐 MSNBC가 친오바마적인 입장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만, 그래도 생방 중의 저런 살벌함이 낯설긴 마찬가지. 앵커도 화가 나는지, 공식 초청 받은 기자한테 저들이 저럴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며 황당해 하더군.

확실히 한국의 극우들은 미국 극우들과 성향상 동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에 대해 온갖 속보이는 궤변으로 비난을 가하면서 여론화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오바마의 의보개혁은 이제 백인들의 자산을 빼돌려 게으른 유색인종들에게 특혜를 주는 "백인 착취"이고, 그래서 그들에게 오바마는 "사회주의자"를 넘어서 "나치"에 가깝다. 이건 뭐, 종부세를 두고 "세금폭탄"이라느니 "좌파 빨갱이 정책"이라느니 떠들었던 어느 떨거지들과 똑같은 어법 아닌가. 알다시피 그 "세금폭탄"을 수거한 후에 소득공제, 부가세, 수도전기세, 사회보장예산 등등의 영역에서 증세와 예산감면으로 깔아놓은 세금지뢰밭에 대해 그들은 모르쇠다. MSNBC 기자의 "무례함"을 꾸짖는 저 젠틀한 양반들이 자기들의 주장이 관철된 후에 발생할 무례한 일상에 대해 관심조차 없을 것이라는 점도 자명하다.

백인 테크니션이 천재라 불리던 베트남계 리서처를 목졸라 죽인 일에 대해 (단지 용의자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며) 인종적인 문제로 논하는 데에는 그토록 조심스러워 하는 것들이, 어쩌면 저렇게 뻔뻔하게 인종문제를 구호로 만들어내는지 기가 찬다. 한국도 의료민영화 문제가 본격화되면 그 지랄을 하겠지.



덧. 다른 보도를 보니 이런 것도 있다. Birther Movement라고,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난 적 없고 실은 아프리카 태생인데 대통령이 되기 위해 출생기록을 위조했다며 계속 음모론을 펼치는 백인들의 운동. 별의 별 짓을 다하는구나.

2009년 9월 8일 화요일

두 엔터테인먼트 자본의 행보가 보여주는 것

요 근래 문제가 되었던 두 아이돌에 관한 이슈 중 하나가 오늘 파국적인 결말로 치달았다.
두 가지 이슈가 모두 두 아이돌 스타 개인들의 성정에 관한 문제로 환원되어 논란을 빚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최초의 행위자가 그 개인이었건 아니건
이미 여론 속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의 행위주체는 그들 개인이 아니라 그들의 기획사인 것이 맞다.
개인이 행위 주체로 나서고 싶어도 기획사와 매니저의 관리 속에서 철저하게 걸러질 수밖에 없을테니.

그렇게 봤을 때, 두 사건에 대한 이들 기획사의 대응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표절 논란. 이것은 결국 (문화)자본의 '보편적인' 시장윤리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들 자본은 자기네 바닥에서 그들 나름의 윤리체계를 만들고 있을테지만,
남의 것을 허락없이 써도 되느냐 아니냐는 그 '바닥' 바깥에서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주제,
더구나 피래미 업로더들을 로펌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바로 그 악명 높은 '저작권'의 문제를
문화 자본 스스로가 건드리는 문제라서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뻔뻔하다.
표절이 아니라 '샘플링'과 '인용'과 '오마주'를 오가며 알리바이를 위한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그리고 분명히 내부적으로는 법적분쟁을 막아줄 사후계약을 통해,
누구나 지적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점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낸다.

반면, 한국비하 논란. 이것은 말하자면 자본의 '특수적인' 시장윤리에 관한 것이다.
자본이 자기네 '바닥'으로 설정한 곳, 그리고 그 바닥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곳에서의 배타적인 윤리체계.
여기서의 윤리는 그 바깥에서의 보편적인 윤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내부의 윤리체계, 이를테면 내셔널리즘이나 남성성에 관련한 민감한 부분들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어찌보면 보편적 윤리와는 거리가 먼, 규율에 가까운 체계인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과 아이돌을 분리한다.
여기서 그들 문화자본은 냉혹하다.
게시판에서 비아냥으로 떠돌던 명칭 '외국인 노동자'가 여기서는 정확하게 적용된다.
자본은 위기에 몰려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불필요해진 노동자는 '모두'의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이로써 그들의 특수한 윤리체계는 강화된다.

이건 어쩌면 한국 사회 전체의 거울이다. 아니 신자유주의 시대 세계의 거울이기도.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의료민영화 논의

여기 언론들이 전하는 오바마의 의보 개혁에 대한 마타도어가 장난이 아니다. 기껏해야 우리보다 못한 수준 혹은 우리 정도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일 뿐인데, 오바마는 순식간에 사회주의자에, 반기독교주의자에, 코뮤니스트에, 심지어 스탈린주의자, 나치로까지 둔갑했다. 개혁안에 포함된 안락사 문제를 가지고 종교 문제로 확대시키면서 여론은 갈수록 우왕좌왕하는 듯하다. 의료자본은 의보개혁이 관철되지 못하도록 온갖 수작을 부리고 있겠지. 애초에 미국의 의료 수가는 정당한 시장 가격이 아니라 동업자들의 담합에 의해 상향평준화된 것이겠지만, 이미 인클로저 운동이 끝난 뒤에 땅을 나눠갖자고 외친들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조중동의 롤모델인 FOX 같은 미디어들이 의료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짓을 할리도 없고, 오히려 더 치졸한 방법으로 오바마를 코너에 몰아가겠지.

명박이가 펼쳐놓은 삽질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의료민영화 만큼은 그런 삽질의 피로감 속에 묻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한번 들어서면 절대로 되돌아 올 수 없는 의료지옥의 티켓을 넋놓고 손에 쥘 수는 없지 않은가.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소시민들의 보신주의를 위협했기에 2008년의 촛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라면, 의료민영화는 그보다 더 큰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 아니 가져야 한다. 꾸준히 담론을 만들고 그 순간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폭발의 순간을.

2009년 8월 8일 토요일

1981년의 프레디 머큐리

오늘 만나러 간다!

바쁜 통에 그닥 내키지 않았던 MT를, 사람이 적은 것을 핑계로 취소하고 남은 자들끼리 퀸 라이브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2009년 8월 1일 토요일

시간이 없지만

오늘부로 휴직 시작이다.

사람들 만나는건 되도록 7월에 다 끝마치려 했으나, 다음주, 그 다음주에도 찔끔찔끔 약속들이 생기고 있다.
짐도 하나도 안 쌌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한가지 계속 뒤를 긁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니..

이.. 이건 놓치지 말아야겠지?

2009년 7월 27일 월요일

지아장커의 항의

방금 호주 멜버른영화제에 대한 중국네티즌들의 해킹 보도와 함께 이어진 보도. 낯익은 감독의 얼굴이 화면에 뜨고 그 사람의 것이라는 빠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왜 하필 이때 그런 사람의 영화를 틀고 초청까지 하는 것입니까!"

위구르인족의 '대모'라는 레비야 카디르를 담은 다큐를 상영하고 그녀를 초청하는 영화제, 그 영화제에 대해 항의하면서 참가를 취소하고 보이콧을 선동하는 중국감독들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첫머리를 차지한 '가장 유명한' 감독.

그렇구나. 중화대국의 그 큰 발걸음을 런닝셔츠 바람으로 비웃을줄 알던 그 사람도 실은 뿌리 깊숙히 '한족의 아들'이었구나. 충격과 공포다.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398578_2687.html

2009년 7월 23일 목요일

미디어법과 테이져건

미디어법 문제와 쌍용차 사태를 전혀 별개의 사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법은 몰상식의 문제로, 민주주의의 문제로 보는 데 비해, 쌍용차 사태는 국민경제적 사안에 대한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순진무구한 생각에는 박근혜식 '뒤에서 칼꽂기'가 제격이다. 미디어법은 의회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의회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수(數)와 힘의 우위에 기반한 폭력적 입장관철을 그럴싸한 외피로 가린 것에 불과하다. <100분토론>이 100분간의 한판 버라이어티 쇼이듯이 의회에서의 '합의와 토론'은 판타지다. 지금 문제를 단지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로 보는 '합의 판타지' 애호가들에게 남은 여생은 고난의 연속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미디어법이 경제적 민주주의와 깊이 결부된 의사소통의 문제라는 데 있다. 미디액트가 감사로 발 묶이고 각종 독립영화 단체, 군소 영화제들이 지원금 삭감과 지원 철회의 된서리를 맞는 등 영화판의 선행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소수자들의 표현과 의사소통 통로는 점차로 줄어들고 있다. 조중동이 불온한 이유는 친일의 행적, 독재에의 부역 문제 뿐 아니라, 그들 언론 자본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 사채 자본과 재벌 자본이라는 데서부터 유래한다.
한겨레와 경향이 경영난에 허덕이고, MBC가 광고 급감의 위기를 맞는 상황은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본질이 아니라, 그들 자본이 취약하고 재벌 광고주들의 흔들기에 큰 폭풍을 맞을 정도로 빈곤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미디어법은 친정부적 언론의 양성 문제이기 이전에 친자본적 언론의 양성 문제다. 이번에 미디어법과 함께 가결된 금산분리완화법 역시 재벌자본의 입김에 의한 것이라고 볼 때 둘은 한 몸이다. (물론 이러한 친자본적 언론의 양성은 친자본적 정권의 재창출이라는 악순환을 낳게 될 것이다.)

쌍용차 문제는 여전히 '국민경제'라는 판타지에 '국민' 명찰을 단 사람들이 휘둘리고 있다는 사례이며, 그 '국민경제 살리기'가 실상은 재벌과 거대자본 살리기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시키는 사례다. 세금을 풀어 대자본의 파국은 막을 수 있지만, 그 자본이 희생양으로 삼은 '국민'들은 구할 길 없는 실업과 파산의 정글로 몰아내야 하는 정부. 일자리 창출이라는 '단감'을 위해 일자리 포기라는 '대승적 판단'에 몸을 실으라는 정부. 이제 그 정부가, 자본의 앞잡이가 총을 빼들었다. 테이져건을 든 특공대들이 사냥에 나섰다. 사냥감은 이미 '국민'의 자격을 잃은 자들, '국민경제'를 지킬 수 없으면 '국민'의 권리도 자격도 갖출 수 없는 자들이다. 총을 빼든 정부는 이것이 합의를 위한 싸움이 아님을, 그저 자본과 임노동자 사이의 전쟁에 불과한 것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합의판타지' 애호가들에게 미디어법과 달리 쌍용차 문제는 노조원들이 집단이기주의를 버려야 하는 문제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판타지가 깨진 후의 세상은 생각보다 더 잔혹하다. 그들 역시 비정규직 '보호'법에 따라 비정규직 자격을 잃지 않도록 보호 받아야 하는 운명이며, 그들 역시 무너질 위기의 대자본을 위해 가미가제처럼 대승적 희생으로 내몰릴 운명이다. 아마도 '합의판타지'의 연장을 위해 10월 선거와 다음 대선에서 열심히 투표하겠지. 그러나 어쩌나.. 미디어법을 '합의판타지'의 장애물 정도로 축소시키는 그들의 대안세력, 민주당 역시 '국민경제'의 애호가들이다. 판타지의 달콤함을 갈구하며, 당장의 난리통을 냉소하며, 언젠가의 '한 표'로 한판역전승을 꿈꾸며 관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테이져건의 과녁이 되어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하는 사냥감으로 돌아간다.

내가 느낀 무력감은.

국회 조폭들의 뻘짓거리에 무력감 따위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아니 무반응이, 그 깊은 권태감과 귀아픈 적막이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벤야민이 바라본 바이마르가 이런 곳이었을까.
도망가면 안되지만, 도망칠 곳도 없지만, 그런 감정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