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위험한 장소"의 인종과 계급 정치학

Keith Jarrett이 뉴저지에서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심 끝에 보러 가기로 했다. 한국 공연이 공연장에 대한 Jarrett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좌초된 적이 있기 때문에 뉴저지까지 가는 교통비나 숙박비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공연이 개최된 뉴왁(Newark)은 뉴욕의 할렘 못지 않게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곳이었다. Rutgers를 비롯해 네 개의 대학이 있는 곳이지만, 워낙에 총기사고나 강도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가기 전부터 긴장을 좀 했다. 공연이 늦게 끝날테니 가깝고 싼 숙소로 하자 싶어서 YMWCA가 운영하는 호스텔에 예약을 해두었는데, 위험한 장소에 대한 공포심이 공연 하루 전날 급팽창하는 바람에 기차역과 호스텔 사이의 최단거리를 찾느라 구글맵과 뉴저지 운송사이트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마음을 졸이며 Broad Street 역에서 내린 시각은 6시. 이미 어둑어둑한 참이었고 거리는 한산했다. 호스텔 맞은 편에 있는 Washington Park 쪽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에서 스케이트보드 타는 소리가 들렸다. 껄렁한 10대들과 시비라도 걸릴새라 빠른 발걸음으로 지나는데 의외로 재밌는 광경이 보였다. 대충 15살 남짓으로 보이는 흑인 하나, 백인 하나의 사내애들 둘이서 놀고 있었다. 한 녀석은 보드를 타고 슬라이딩을 시도하고 다른 녀석은 보드를 트랙 삼아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내 편견인지는 몰라도 보스턴에서는 저 나이 또래의 흑인, 백인 아이들이 같이 노는걸 본 적이 없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고 동네를 둘러보니 그때서야 긴장이 풀리고 뭔가 느낌이 왔다. 길에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 후줄그레한 복장의 흑인들. 여긴 그저 전반적인 주민들의 소득 수준이 낮은 동네일 뿐이다. 백인들도 필시 중산층 이하의 가정의 아이들일테고, 흑인이나 히스패닉의 진입장벽이 높은 사립학교 같은 곳이 아닌 공립학교나 싼 사립학교를 다닐테니 어울려 노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테지.
YMWCA에 들어서니 희미한 느낌은 강렬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곳은 호스텔로 룸을 렌트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빈민들이 싸게 공동주거하는 곳. 저층은 그렇게 들어온 가족단위의 빈민들이 사는 곳 같았고, 그 위로 여행객들을 받는 듯했다. 시끄럽게 애들 우는 소리가 들리고, 분명 빈곤 때문에 정크푸드로 살을 찌웠을 비만의 엄마들이 아이들을 다독인다. 흑인들과 히스패닉, 드물게 인도나 아랍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 백인들도 보였는데 늙어서 거동이 힘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나 어딘지 몸이 불편해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쪽에서 역시 흑인인 관리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규정을 준수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1시간 가량이나 걸려 체크인을 하고 올라간 9층 숙소는 1인 1실이라 조용했지만, 시설은 무척 열악했다. 하루만 자고 일찍 체크아웃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같은 층을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흑인 아이들이었다. 그냥 여행객으로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분위기를 보니 대부분 인근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 같았고, 아마도 이곳은 그네들에게 기숙사 같은 곳으로 쓰이나보다.
그리고 8시 공연. 공연장 입구에 들어서니 이제 뉴왁의 그 "악명"의 진원지를 알겠다. 프루덴셜 같은 거대 금융자본이 투자를 해서 지어진 뉴저지퍼포밍아트센터(NJPAC)는 보스턴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크고 세련된 디자인의 건물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관객들은 와인 한잔씩 마시는 중이었고, 그 대부분은 백인들이었다. 간혹 나 같은 아시아인들이 보였지만 흑인이나 히스패닉은 드물었다. 아마 그 상당수는 자가용을 몰고 와서 주차장에서 이곳으로 바로 왔겠지. 바로 옆 블럭에 붙어 있는 YMWCA와 이곳의 분위기는 그 물리적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판이했다. 유리벽 바깥의 뉴왁은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두려운 곳일테다. 분명 그곳에서는 총기사고도 있었을 것이고 강도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이곳에 대한 공포의 모든 것은 아닐테다. 이곳은 그들에게 너무나 다른 이들이 사는 곳이고 그 다른 이들은 뭔가 자신들의 재산과 안위를 위협할 것만 같은 존재들일테다.
아시아인들, 특히 한국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높은 교육수준과, 또 아마도 비자라는 높은 진입장벽을 뚫은 경제적 배경 덕택에 문화적으로 백인사회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많다고 들었고 또 그렇다고 느끼고 있다. Keith Jarrett을 좋아하는 나는 뭘까, 여기서 와인을 들고서 약식으로 스탠딩 파티를 즐기는 중인 관객들 속의 나는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좋았지만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고, 예술가의 열정으로 난해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피아니스트의 위트에 솔직하게 박수 치기도 쉽지 않았다.


뉴왁 브로드 스트릿 역 입구. 교육도시임을 강조해 놓은 간판.



멀리 프루덴셜 건물이 보인다.


YMWCA 숙소. 하루 정도 자고 나갈 만은 했지만, 기숙사로 쓰기엔 많이 낡고 지저분했다.


뉴저지 퍼포밍아트센터 프루덴셜홀.



공연장의 관객들.

댓글 5개:

  1. 아, 공연보러 가는 여정에 이렇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니... 나는 빈민가와 벽 하나를 두고 서 있는 자이살메르의 한 호텔 옥상에서 빨래인지 넝마인지 알 수 없는 옷들이 빨랫줄에 걸린 걸 보면서 과연 내가 이 나라를 제대로 둘러보고 있는 것인가하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그나저나, Keith Jarret을 본 거구나. 부럽다.

    답글삭제
  2. suksim //
    자이살메르는 어디냐? 은근 자랑 같은데? ㅋ

    답글삭제
  3. 북인도 라자스탄주의 도시. 자이푸르, 조드푸르와 함께 구시가지가 남아있죠. 석양이 질 때쯤 구시가지의 흙벽이 빛나서 '골든 시티'로 불려요. 난 사실 숙소 바꾸자고 했는데, 친구들이 무섭다고 거부해서...

    답글삭제
  4. 다 알아도, 무서운 건 무서워-_-; 근데 치안이 너무 좋은 일본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것도 답답하다고 하더라.

    답글삭제
  5.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