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연구실 라운지(?)의 한쪽 벽면은 꽤 재미있는 컬렉션으로 이루어진 책장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연구자들이 1년 혹은 1년 반씩 머무르면서 보던 책을 돌아갈 때 기증하고 간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취향도 각양각색이고 연속간행물도 다섯 권 넘게 있는 경우가 잘 없다. 오늘 혼자 밤새다 쉬는 중에 한권 눈에 들어왔는데 『당대비평』 2003년 여름호다. 다른 곳에서 봤으면 그냥 지나갔을 테지만 여기 있는 단 한권의 당대비평, 그리고 그해 여름에 여기를 지나쳐갔을 어느 연구자가 봤던 책이라 하니 호기심이 생겨 들여다보게 되었다.
시작한지 얼마 안된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로 이루어진 특집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당시에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는 것이다. '김영삼 + 김대중'의 10년이 '잃어버린' 기간이었다는 것인데, 아마 그 영감들 입장에서는 5년 더 지나고 보니 앞쪽 5년은 잃어버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렇다고 똑 같은 표현을 그대로 당겨쓰다니 참으로 실용적이로고! 뭐 암튼 이미 그때부터 노무현의 실책들은 드러나고 있는 중이었고, 윤평중이 "지배세력의 교체"를 위한 싸움이라고 봤던 그 정부의 초기 행보들은 그보다는 개뿔 "헤쳐모여"의 판타지와 그 환각 이면에서의 지능적인 지배계급 재결집에 판을 깔아주고 있었다. 당시의 논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얼마 전에 본 아룬다티 로이의 글도 있었는데, 경악스러운 세계의 상태에 대한 고발의 어조가 주를 이루는 그녀의 논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만 고발해야할 내용이 7년이 지난 지금 더 많이 생겨난 것이 차이랄까. 오바마의 세계도 911 이후 부시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진 않으니.
한국에 왔던 요한 갈퉁과 마이클 하트의 대담도 있었고(각기 따로), 그 당시 노동에 관한 꽤 신선한 담론이었던 "노동사회"에 대해 홀거 하이데가 특별 기고를 하기도 했네. 독자 투고란에는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어느 낯익은 이름이 있었고, 문화비평란에는 당시로서는 가장 뜨거운 영화였을 《살인의 추억》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
그때 난 뭘 했나.. 생각해봤다. 아마 가장 혼란스러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시기였던 것 같다. 여러 사람들과 '새로운' 시도들을 했던 것도 같고,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어리버리 했던 것도 같고. 당대비평의 영화평론을 보니, 같이 세미나 하던 후배들과 《살인의 추억》을 보고 나왔더니 한 여자 후배가 "보는 내내 무서웠다"고 했던 것도 기억나네.
시간 참 빨리 간다. 대학 졸업 이후의 삶이 희뿌옇게 보이던 것도 어제 같은데, 그러고도 반년 뒤에 있었던 일들이 이렇게 회고의 대상이 되다니. 그때 당대비평을 봤던 저 연구자는 지금 무슨 연구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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