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떤 선생님의 부탁으로 찍사 노릇을 하기 위해 조지 워싱턴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인 Mount Vernon과 케네디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 1일 여행을 다녀왔다. 마틴 루터 킹 데이라 해서 휴일이라 마침 요즘 출근하는 곳이 쉬는 날이기도 했고. 가기 전에는 조지 워싱턴 집이든 뭐든 별 생각이 없었다. 자기들 초대 대통령 기리는게 얘네들한테야 한국에서 단군 기리는 거랑 비슷한 일일거란 정도의 생각이 있었을 뿐.
그런데 그런 준비 안된 내게 정통으로 한방 먹이는 계기가 있었으니.. "We fight to be free"라는 영화였다. 마운트 버넌은 구조상 Ford사가 만든 오리엔테이션관을 반드시 지나가게 되어 있는데, 워싱턴 생가 미니어처라든가 각종 그림, 도표 등을 지나면 약 200석 규모의 극장이 나온다. 포드가 돈을 대서 그런지 극장이 때깔부터 달랐는데, 안내하는 백인 아주머니가 아주 자랑스럽게 이 fabulous한 영화를 절대 놓치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래 뭐 시간도 넉넉하겠다, 전공도 전공이겠다 한번 보고 가자 생각하고 자리를 잡았다. 단체 관람 온 것으로 보이는 애들이 가득 자리를 채우고 있어서인지 살짝 어수선하다고 둘러보는 와중에 영화가 시작한다. 오우 포드가 돈을 대서 그런지 교육영화 주제에 기름기가 좔좔 흐른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전투병 의상 하며 상류층 여성들의 화려한 코스튬 하며. 워싱턴과 훗날 영부인이 될 마사가 처음 만나는 장면도 무슨 상층 가문의 파티 같은 곳인 듯 했다. "인디안 죽여본 적 있어요?" 뭐라? 마사 집안의 어린애 하나가 워싱턴에게 당돌하게 질문을 하네. 워싱턴 머뭇거리고 마사가 애한테 뭐라고 한다. 아하 나름 그 당시 분위기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인가보다 생각했다.
사실 전쟁 얘기가 드문드문 나올 때도 뭐 뻔한 영국영화식 전쟁 묘사가 나올거라 안이하게 생각했다. Revolutionary War라니 당연히 영국군과의 전투가 나올거라 생각했고. 그런데 갑자기 매복해 있던 우르크하이와 오크족이 등장한다. 그 흔한 깃털 모자도 안썼다. 코와 귀에 온갖 피어싱을 한 독기서린 눈을 가진 그들. 아놔, 진짜 인디언과 전투가 나올줄이야. 이건 반세기 전에 수정된 진부한 코드 아니더냐. ㅡㅡ; 감히 사령관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짐승 같은 것들의 공격에 우리 워싱턴 장군의 눈이 이글거린다. 세상에, 그 '짐승'들과의 전투가 이 영화가 묘사하는 레볼루셔너리한 전쟁의 전부다. "이 땅은 우리 땅이니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며 식민군대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면서 정작 살육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땅 숲속에 숨어 사는 우르크하이들이다. 하긴 같은 백인들끼리 싸우며 피 흘리는 모습보다야, 음침한 인상에 괴상한 장식을 한 숲속의 우르크하이들과 싸우는게 더 스펙터클하겠지.
영화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2010년 정초에 그런 영화를 자랑스럽게 교육용이랍시고 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불이 켜지고 문득 단체 관람온 애들을 다시 둘러보니 알 만하다. 스물에서 서른 남짓 되는 애들 중에 흑인 하나, 아시아계 하나, 나머지는 모두 백인들이다. 어디 급이 좀 높은 사립 고등학교에서 왔나보지. 마틴 루터 킹의 날에 저런 영화를 보는 그 흑인 아이는 뭘 생각하고 있을까? 마운트 버넌 투어 코스 막바지에 워싱턴 묘비가 있고, 그 옆으로 워싱턴 가문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기리는 비석으로 가는 길이 있다. 초딩들을 인솔한 교사가 워싱턴을 기리는 의식을 진행한다. 옆길로는 가지 않는다. 그게 코스의 마지막이다.
《아바타》로 수정주의 사관을 백날 향유하면 뭐하나. 이 국가의 시원이 되는 장소는 여전히 누구와 싸워 누구로부터 쟁취한 나라인지 매우 솔직하고 당당하게 기념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아바타》의 남자 주인공과 워싱턴이 참 닮았다. 10개의 방에 끊임 없이 손님을 들이며 영부인의 모범을 보였다는 마사와 네이리티는 또 왜 저렇게 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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